두번째 이야기
일부 선교사들은 아무래도 미국과 일본이 친선관계에 있고, 선교활동에 제약이 있을까 일본 정부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일제는 악용하여 백성들과 선교사들을 갈라놓는 여론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의 책에서 미국정부와 선교사들이 아무리 개입하지 않으려 해도 한국에서 일제와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이것을 외교와 내치 두 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기독교회 내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자고 하든지 배일사상(일본을 배척)을 요동치게 해서 독립을 회복하자는 둥, 그런 어리석은 정치적 전략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일본 정부의 정략과 부딪치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곧 첫째는 외교와 관계되는 일이고 둘째는 내치와 관계되는 일이다”
일제의 국제외교에 걸림돌인 한국교회
한국의 ‘교회’란, 가장 먼저는 일본제국의 국제외교, 특히 대미외교에서 큰 걸림돌이 된다고 이승만은 말합니다.
“외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일본정부의 목적은 아주 영원히 한국과 서양 각국과의 교류를 끊어서 일본이 한국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세계가 전혀 모르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인들이 시작하였던 경인철도와 서울 시내의 전차 회사며 전기 회사는 모두 일본인이 주도하도록 만들었고,
서울 안에 서양인이 설립하였던 애스토리아 호텔과 손탁 호텔, 두 호텔 모두 일본인들이 사서 하나는 없앴고 다른 하나는 통감부에서 경영하였다.
서양의 유력한 사업가들은 애초에 그곳에 들어갈 까닭이 없지만, 간혹 여행 차 잠시 서울을 들릴 때에 자연히 가야만 하는 곳이 그 호텔이다.
말 한마디를 물어보려 해도 일본인들을 찾아가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
혹 이름 높은 신사가 여행을 위해 한국에 들어오면 부산항이나 의주 압록강에서부터 군인, 경찰, 외교관들이 전후좌우를 호위하여 들어와서 만찬과 연회로 성대히 대접한다.
대일본제국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고 못된 조선 인종의 더럽고 추악한 것을 들어낸 후에 떠나보내니,
한국인이나 선교사는 애초부터 대화 한마디 할 수 없다.
세계 여행자들은 구미 각국에 항상 왕래하는데,
세상 구경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동양에 갈 때에는 우선 4억의 인구를 갖고 있는, 제일 오래된 나라인 청국에 가서 북경, 상해, 광동 등지의 유명한 상업도시와 만리장성, 성시, 누각, 이삼천년 된 고적들을 구경하려 한다.
그 뒤에는 일본에 들어가 여러 섬의 빼어난 경치, 요코하마와 동경의 근대화된 생활상, 유명한 벚꽃과 비단 기모노 등 모든 아름다운 상품들을 구경하려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즐길만한 것이 적은 듯, 주마간산으로 바삐 지나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한국에 들리지도 않고 지나가려 한다.”
일단, 당시 조선인들과 외국인들은 접점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미국인이 들어와서 세운 시설들, 인프라 등은 모두 일제가 인수해 본인들이 운영하거나 친일적인 인사에게 내어줬습니다.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모두 일제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름 높은 신사, 즉 고위급 관료들에 관해서는 일제가 성대하게 대접하고 한국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돌려보내니, 가진 자본도 건물도 나라도 없던 한국인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외국인들에게 한국 자체도 딱히 매력이 있진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문물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서 격차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서양이 우리에게 배워갈 것도 생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100년전에는? 이승만의 말이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말로 해드리는 것보다 사진이 나을 것 같아 100년 전 사진을 좀 가져와봤습니다.
각각 뉴욕(미국), 동경(일본), 한양 입니다.
평양, 동방의 예루살렘이 되다.
당시 서양과의 유일한 접점이 될 수 있던 것은 오직 ‘교회’ 뿐이었습니다
“오직 기독교회에 있어서는 이와 같지 않다. 서양인의 재정과 서양인의 인력으로 설립한 것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10-20년 내로 철수할 리도 없는 것이며 그 교회가 있을 때까지 서양의 예수 믿는 모든 나라들과 소통하는 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이익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한국인들에게 영적 행복을 주려고 온 것이니,
자연히 그 관계가 밀접할 수밖에 없다. 외국에 가서는 한국 교회의 정황을 설명하고,
한국에 와서는 서양교회의 상황을 말하면서 서로 정을 나누고 동정을 표명하여
피차간에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 형제와 한 식구가 되는 이치를 가르친다.”
이승만의 윗글에 달린 주석을 보니,
‘평양에서 활동한 감리교 선교사 무어는 1907년 평양대각성 운동 이후 ‘서양인과 한국인이 한 형제이고 하나.라며 기존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고백했다’ 고 써있습니다.
평양 대각성(대부흥), 1907년에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영적 각성 및 부흥의 사건입니다. 이는 1907년 1월 14일-15일, 평양 최초 장로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겨울남자사경회(성경 공부 중심 집회) 기간 중에 발생했습니다. 그때 세계교회사를 보면 1800-1900년대를 거치며 미국, 영국, 인도 등에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났는데, 평양 집회에 참석했던 맥퀸 선교사는 '이 때 임한 성령의 역사가 당시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실제 손에 잡힐 것 같은 성령의 나타남과 초자연적 회심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한 후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임했던 성령 사건, 오순절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해 교파를 초월한 회심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인 부흥 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개신교의 교세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특히 이때 장로교가 크게 부흥하며 최대 개신교단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됩니다. 아시아 변방의 한국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전세계 선교사들이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단지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앞서 무어선교사의 말처럼 당시 부흥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고, 접점이라곤 찾아볼수도 없던 서양인과 동양인이 거의 ‘형제’와 같이 서로를 느끼게 되는 기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무어선교사만의 고백이 아니라 당시 1900년-1910년 부흥이 지나는 동안에 선교사부터 조선 사람들까지 모두의 고백이었습니다.
평양 부흥이 일어나기 전, 1903년 함경도 원산에서 평양대부흥의 전조였다 평가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했던 하디 선교사도 그랬습니다. 그는 의사였고 엘리트였으며 열심으로 조선사람들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1901년부터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3년간 선교활동을 했어도 큰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심한 패배감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중국 의화단 사건으로 1903년 원산으로 피신해 온 선교사 화이트와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맥컬리가 함께 했던 사경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디에게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강연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하디가 이를 준비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는데, 본인이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회를 준비하는 내내 성경 말씀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며 함께 한 동료들에게 조선인들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명문대를 나와서 의사가 되어 조선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생각.. 꾀죄죄한 조선인들과 나는 인종이 다르다는 인종적 우월감.. 여러모로 부족한 조선사람들을 도와주러 왔고 그만큼 열심히 도와줬지만 변하지 않는 조선사람들때문에 성과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습..
그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신의 '교만한 마음'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조선사람들의 겉모습은 바꿀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까지, 생각까지는 자기가 바꾸지 못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디에게 성령이 말씀으로 깨닫게 하심에 따라, 자기가 감추어둔 마음 속 죄의 본질을 직면하고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반역자로 갇힌 자신의 본질을 깨달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그의 생각이 변하자, 조선사람들이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며 집단적인 회심과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장 3-5절
1907년에 평양의 부흥도 원산과 비슷하게 말씀 사경회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길선주라는 조선인이 성령의 감동으로 교인 600여 명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합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의 유산을 정리하다가 당시 화폐 가치로 100달러에 해당하는 큰 돈을 몰래 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곳곳에서 노름하고, 아내를 학대하고, 첩을 둘이나 두는 등. 성경 말씀과 달리 살았던 죄들을 속속들이 고백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엄청난 불길이 되어 집단적으로 회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발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에 의하면 1907년의 부흥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07년 1월에 평양 장대현교회가 부흥하니라.
평남 도사경회때에 각 학교에서도 성신(성령)받기 위하여 기도하더니, 김찬성이 인도하는 숭덕학교 기도회에서 3백여명의 소학생 일동이 회죄통곡하니 이 소식이 사경회에 전파되고, 길선주가 (사경회에서) 성신 도리를 교수(가르치는)중 채정민을 비롯하여 사경회 각반이 회죄통곡(죄를 회개하며 통곡)하였고, 선교사 이길함이 매일 밤 예배 인도 중 홀연히 급한 바람이 임하는 것 같더니 만당 청중이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각기 죄를 자복하며 통곡하니라.
이렇게 10여일에 각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으며, 길선주의 인도로 1개월을 더 계속하는 중 수천 명 교인이 다 중생의 성신세례를 받았느니라.
이 부흥은 접점을 찾아볼 수도 없던 동서양을 하나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서양 선교사들에게는 당시 조선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겸손한 마음을, 조선인들에게는 서양인들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을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
원수된 사이를 하나로 만들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성령을 통해 각자 하나님과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인간의 '본질'을 각성함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성경의 유대인(이스라엘 사람들)과 그 외의 이방인들(그리스 로마 문명권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인들에 대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분개심, 적개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를 따르던 제자 중 몇몇은 독립운동을 하던 극렬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에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은 하나님과의 원수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가 말하길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한 것 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부흥'을 많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디 선교사나 평양대부흥을 말하는 곳도 봤습니다. 일종의 유행같이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부흥일까요? 그리고 '어떤' 부흥을 갈망해야 하는 걸까요? 기독교인으로서 '한국교회핍박'을 읽으며 제 신앙도 돌아보게 되었고, 당시 한국교회를 태동시킨 부흥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를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 방언과 이적들이 나타난 것에 두는 것을 듣곤 합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 사건의 가장 큰 의미와 기적은 바로 사람의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만큼 변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하늘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께 표적(sign),즉, 기사(wonders)나 기적(miracles)같은 것들을 구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이 도시가 무너지니,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를 요나가 니느웨에서 외치자, 왕과 백성들 모두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돌이키고 회개합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고 전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심판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의 전신인 널다리골 교회,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한국장로교회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1907년 부흥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합니다.
'1906년 가을에 기도의 영이 선교사들 자신들 위에 오셔서,
다가오는 겨울의 성경연구반(사경회) 위에 보다 깊고 부요한 축복을 위해 간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1907년 1월 성경훈련반의 마지막 날들 동안 저녁에 전도 집회에서 성령의 임재의 공적 나타나심이 있었다.
이러한 집회들에서 사람들은 죄의 무서운 결과들을 깨달았으며, 죄가 죄 없는 그리스도를 고통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영은 자신을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내셨다. 이것은 교회를 정화시켰으며 그리고 수천의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헌신과 새로운 능력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오순절때나 한국교회에 찾아온 성령의 강림은 각자의 마음이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과 각 사람, 그리고 사람 간의 모든 원수됨이 사라지며, 진정한 하늘의 복인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심이 아니었나. 그리고 썩어 없어질 유한한 육신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진정한 교회를 세우려 하심이 아니었나. 여기서 제게 남은 질문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는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부흥을 원한다면 주께서는 다른 어떤 표적보다, '요나의 표적'을 베푸심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당시에도 세계적으로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들, 소위 '부흥'들에 긍정적이든 아니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하지만, 평양대부흥의 사건은 교단을 초월하여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죄에 대한 통회자복으로 탄생한 동서양이 하나된 교회. 그래서 세계의 교회는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즉, '평화의 도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교회 일에 전력하는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들이 연설을 듣거나 선교여행자들의 말이나 글을 통해 한국 기독교회의 지나온 역사를 알게 된 후에는, ‘한국이란 나라는 정말 신기한 곳이구나’ 여기게 된다.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간 지 30년이 채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사역이 어찌나 잘되었는지..
옛날 오순절 성령의 감화를 받은 것 같이 뜨거운 마음을 얻고 돌아온다는 말을 듣게 된다…
영국과 미국 교회 친구들이 한국을 이렇게 흠모하는 까닭에 교회의 유력 인물들은 동양에 갈 때면 만사를 제쳐놓고 한국을 심방 하게 되는데, 이는 모두 한국교회를 구경도 하고 그 정세와 형편도 연구하려 함이다. 일본인들은 다른 곳으로 초청하여 접대할 수도 없고 초청해도 가지 않는다..
늘 한국 선교사들의 집에 가서 머물려 어떻게 이렇게 부흥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게 된다. “
그렇게 기적적인 교회의 부흥으로 인해 전세계 수많은 선교사들, 방문객들이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으로 찾아왔습니다.
1907년 평양을 시찰한 러트 박사는 당시 한국교회의 역동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평양에서 교회의 성장은 놀랄 만한 데가 있다.
매 주일에 교회에 참집하는 한인은 약 1만 4천 명에 미친다.
평양 인구를 4-5만으로 계산한다면 교인은 그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러한 추세로 10-15년간에 북한에 있어서 신도 수는 백만을 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은 교회가 일제의 외교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것입니다.
평양에서 가까운 지역인 선천도 부흥의 여파로 거의 평양만큼의 교회로 성장하자, 결국 일제는 선천의 교회학교인 신성중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을 잡아들입니다. 그리고 105인 사건을 만들어 서북 기독교인들을 핍박합니다.
“이러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서양 선교사들, 외국 교회 방문객들은 실상 정치적 간섭을 하려거나 배일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한국에 교회가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한국의 정치 상황을 외국에 있으면서도 알게 되는 것이며, 세계의 정의를 한국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일본 당국자들이 어찌 이런 것을 모르겠으며, 장차 일본에 큰 후환이 될 것이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이렇게 외교적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싫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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