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reedom Voice

이승만의 한국교회핍박(내치상 문제: 교리)

네번째 이야기


당시 한국교회의 법적, 제도적인 특성도 일본의 내치에 큰 방해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교회의 교리 자체가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걸 이승만은 책에서 

1)기독교회 안에 활동력이 많기 때문이다  2)교회를 통해 국민의 원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3)교인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4)혁명사상의 풍조가 동양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로 설명합니다. 

 
 


 

 한국이 일본에 합병을 당한 뒤부터 한국인들은 낙심하고 낙망해서 아무런 낙도 없고 어떠한 여유도 없으니 무슨 활동력이 생기겠는가? 

 

이제는 “더 기대할 것이 아주 없다” 하며 영영 낙심하여 맥이 풀려 사지가 게을러졌다.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활동력 없어져서 나날이 쇠잔해가고, 날로 썩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일반적 상황이다 

 

특별히 기독교회는 끝없는 생동력이 저절로 생겨나 총명하고 준수한 청년들이 서로 이끌고 권하며, 

“온 세상이 모두 우리의 적국이라고 해도 우리가 예수와 친구만 되면, 제일 친구가 많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군함 대포가 하나도 없을지라도 만능의 힘을 가지신 하나님만 의탁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의 육신은 죽어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감히 막을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가지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끝없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번 윤치호 씨 등 123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 테네시에 있는 남감리교 해외선교부에서 서울에 파송한 선교부 총무 핀슨씨가 재판에 참여하여 그 갇힌 사람들을 일일히 대변한 후, 작년 9월 29일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여러 달 동안 고초와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조금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고, 정직한 말씨와 절도 있는 기개로 법관을 대하고 있다. 미국 안에서도 이런 처지에 있게 된다면 이같이 굳세게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부랑자나 법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아니요, 태반이 장로교 교리 문답으로 잘 훈련된 교인들이다.

 

– 1)기독교회 안에 활동력이 많기 때문이다 

 

국민의 원기가 쇠하면 인심이 사특 해지고 품행이 부패해지며 나날이 음란하고 방탕한 곳으로 빠지게 되어서, 필연적으로 시들고 쇠잔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동양의 성현들이 항상 도덕으로 국민의 원기를 배양하는 약석을 삼았던 것도 결국 이런 까닭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주권에 복종하는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피위피 아위아하듯이 무관심한 듯 보이기도 한다. 남과 잘 섞이지도 않고 별로 외부 출입도 하지 않고, 경축절 연회에 구경이나 참여도 아니하며, 혹시 일본 당국자들이 벼슬을 하라고 요청하면 정중히 사양하고 물러가, 교회 일에만 몸을 던져 교육이나 전도에 종사한다. 혹 일본 사람들이 얼마씩의 월급을 주면서 정탐해 달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주색잡기로 유혹해도 빠지지 않으며, 어린아이와 청년들에게 모르핀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폐단을 지적한다. 

 

모르핀이라는 것은 아편과 같아서 한번 습관을 들이면 영원히 끊기 어려운 것으로, 문명한 나라에서는 약 재료로 조금 쓸 뿐 다량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이것을 한국에 많이 전했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미국인 헐버트씨가 누차 비판한 것이다. 

 

기독교회에서는 담배 피는 것을 도덕적 품행이 결여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일본은 담배를 정부의 전매물로 만들어 남녀노소가 모두 피우며, 전국 각처에 담배회사를 많이 설립하여 어린 아이들을 수백 명씩 고용해서 담배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의 뇌 속에 적지 않은 손상을 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문제도 심히 큰 것이다. 

 

뉴욕 장로교 선교부에서 발간한 책에 의하면,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씨가 자기 교인들에게 권면하기를, 담배가 대단히 해로운 것이니 자식들이 피우지 못하게 하고 담배회사에서 일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 경찰들이 주의를 주면서, 

담배는 정부에서 전매하는 것이니, 담배를 반대하는 것은 곧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다. 또 다시 이같이 반대하면 죄로 다스릴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이와 같은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2)교회를 통해 국민의 원기가 다스려질 것이다. 

 


 

한반도의 청교도들 

 

당시 우리는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고 모두가 무기력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교회에 가면 힘을 북돋아주는 그런 말씀들을 전하고 서로 격려하기 때문에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105인 사건으로 잡혀 들어 간 태반이 ‘장로교 교리로 훈련된 교인들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장로교는 한반도에서 매우 큰 교세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19세기 후반’ 조선에 들어온 ‘장로교’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째서 장로교 교리로 무장된 이들이 이렇게 저항적이었고 감옥에 다들 잡혀들어가도 꿈쩍 하지 않았는가물론 현재도 장로교는 대한민국의 가장 큰 개신교단으로 존재하지만, 들어온 지 거의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많은 변천을 겪었고 교단 구분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어 특정 교단을 지지하거나 관심을 깊게 가지진 않았습니다. 단지 나름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이다 정도 생각했을까요?

 

조선예수교장로회희년기념화보집』(민속원 복간, 2020) https://cemk.org/22112/  첫째, 1934년 개신교 첫 희년 때 장로교회가 전체 기독교인(천주교 포함)의 약 55%를 차지하고, 감리교회는 10% 수준이었다. 둘째, 장로교회에는 26개 노회가 있었고, 평양노회와 황해노회가 합계 6만 명 이상으로 두 노회만 해도 전체 28만 장로교회 교인의 22%가 넘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곧 서북 지역의 교세가 2/3로 압도적이었다. 해방 이후 1953년까지 서북과 경상도가 손을 잡으면 3/4 세력이 된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보수주의가 강세인 이유이다. 셋째, 전라도(남장로회 선교 지역)보다 경상도(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선교 지역)에 장로교인이 더 많았다.

 

하지만 한국교회사를 공부할수록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이 땅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도 장로교 선교사,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부흥의 중심도 장로교, 선교 초기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님들도 거의가 세계 각지의 장로교단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선교지역을 나눌 때 장로교가 조선을 맡아 들어왔다는 얘기도 있고.. 이분들이 담당 지역을 국가별로 나누고 대신 공의회(독노회)를 설립하여 함께 선교를 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장로교는 전세계 개신교단 중 가장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과 한국에 거의 몰려있다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가 매우 큰 편에 속합니다. 국내에선 어디서나 있어 세계적으로 다수인 줄 알았더니.. 그런데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역전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실 세가 너무 차이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장로교 교리라던가 제도가 다른 교단의 개교회, 목회자등 영향을 미치고 섞인 경우도 꽤 많습니다. 

 
.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선교사들

 

제네바 종교개혁기념비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칼빈이다. (왼쪽부터)프랑스계 파렐 목사, 칼빈, 칼빈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개혁가 존 낙스이다.   ©위키피디아 영어판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21841#share

 

 그렇다면 한국 장로교의 기원은 어디에 있나?  현재 개신교라고 분류되는 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교는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교단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기원은 종교개혁자 칼빈으로부터 스코틀랜드, 영국에서 미국으로 계승된 신학(칼빈주의-calvinism)과 제도를 정립한 ‘청교도’에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프로테스탄트, 신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칼빈은 교리를 정립, 이것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부릅니다. 또한 교회 정치 형태로 장로 제도를 확립하고 유럽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 칼빈주의 장로교형 치리제도를 가진 교회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들이 제도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채택합니다. 이러한 교회 제도의 차이는 당시 잉글랜드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는 비교적 장로제가 잘 정착한 반면에 잉글랜드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잉글랜드)는 국경문제와 종교문제로 항상 대립해왔습니다. 1534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수장령’(국가 교회의 수장이 교황이 아니라 영국 왕)을 공표하고 카톨릭교회를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영국에서 ‘절대왕정' 시대를 열게 되었고 뒷받침하는 교회 제도로서 ‘감독제’를 채택합니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 안에서 감독제와 절대왕권은 세트로 따라다니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대다수의 청교도들은 칼빈에게 제네바에서 배워왔던대로 장로제를 주장했고 절대왕정에도 대항하여 의회파와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왕가는 당시에 친 가톨릭, 친 프랑스 정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반대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친 프랑스파(가톨릭)와 친 잉글랜드파(개신교)가 맞붙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왕이 가톨릭과 맞붙은 것은 종교개혁의 교리를 지지해서라기보단 정치적 세력 확보를 위함이 컸고, 때문에 영국의 청교도(장로교도)들은 필연적으로 영국 왕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관계는 종교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띱니다.

  먼저 스코틀랜드에서 제네바에서 돌아온 장로교 창설자 존 녹스가 뼛속까지 친 프랑스 파였던 메리 여왕(스튜어트)과 싸우기를 시작하며 가톨릭에서 교회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후계인 앤드류 멜빌 대에는 감독제를 완전히 몰아내며 장로제를 정착시킵니다. 
영국에서도 원래는 장로교회가 왕성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에 다시 수장령이 선포되고 심지어 획일 법령을 내립니다. 국교 만을 위한 통일된 규범을 정하여 반대하는 교파는 처벌하는 법령이었습니다. 그러니 장로교회는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회중교회나 독립교회 형태로 개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후에 영국의 제임스 1세나 찰스 1세 시기,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시민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는 또 장로교세가 강화되는 형태를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에서는 국교의 수장인 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교회 제도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즉, 청교도는 칼빈이 확립한 교리를 따르는 신교도들을 통칭하는 말이고, 교회의 치리 형태를 장로 제도로 택한 경우, 장로교라고 불리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개혁교회의 대표적 형태가 장로제이기도 했고, 실상 스코틀랜드 뿐 아니라 영국도 청교도 주류가 장로교주의자들 이었다며, 청교도가 곧 장로교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장로교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드리면,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John Knox)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는 1544년 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던 조지 위샤트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의 교리를 깨닫습니다. 1551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의 지원으로 종교개혁을 추진하지만, 1553년 가톨릭 신자인 피의 메리(메리 1세)가 집권하자 믿음을 지킬 수 없었던 녹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잠시 체류한 후 제네바로 망명하게 됩니다. 녹스는 제네바에 거주하며 잉글랜드 피난민들, 청교도들의 목회자가 되었고 칼빈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이때 국가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통치되는 ‘신정 국가’에 대한 비전을 가집니다. 이 사상은 스코틀랜드의 언약도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 의해 ‘언약 국가’로 구체화되어 어느정도 결실을 보지만, 영국 전체에 완전히 이루지는 못합니다. 대신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게 이어져 신대륙에서 완전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는 1559년 스코틀랜드로 완전히 돌아와서 개혁당의 당수가 되어 기즈의 메리 여왕과 그녀의 딸 메리 스튜어트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이때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기반이 거의 마련됩니다. 또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줍니다. 

 
 
 

청교도의 언약사상과 연방국가   

 

 특히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은 ‘언약도(파)’(Covenanter)들이라고 스스로를 불렀습니다.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의 무력 저항에 언약사상을 도입하여 칼빈주의를 정착 시키려고 했었던 것을 시점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뿌리깊은 언약신학과 프로테스탄트적인 저항의 정치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즉, 어떠한 권력이든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게 하고 우상숭배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저항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의 정체성과도 같은 말이 되었고,  왕의 탄압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는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1638년 스코틀랜드 국왕이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면서, 국왕은 국가의 머리일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라고 하자 1,200명의 장로교 성도들이 이에 반대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임을 공포하고 여기 서명하여 언약도가 되었다. 이들은 지붕 없는 감옥에서 모두 순교했다. 그리고 언약도를 박해하던 50년 동안(1638~1688) 바른 교리와 신앙을 지키려던 장로교 언약도 18,000명이 처참하게 순교했다.(한국칼빈주의연구원 및 칼빈 박물관 소장)http://www.agoragen.com/?p=6268

 

  청교도들의 언약사상과 국가에 대해 말하기 앞서 이들의 교리를 간략히 먼저 설명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청교도하면 일단 성경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다섯가지 ‘오직(Sola)'을 따라서 핵심교리는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 또한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백성들이자 자녀들 사이에 구속사적으로 맺어온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1)하나님은 자기 피조물과 우리 삶의 모든 영역 및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최고 권위(authority)를 가지시고 통치하신다. 2)구원에 있어서도 왕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뜻-will)대로 죄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자를 창세 전에 예정(predestination)하시고 택하셨다(election). 3) 택함 받은 자(the elect)와 하나님은 언약(covenant)관계로 들어가며 택자가 그분의 약속과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고 그분의 나라가 수립된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나라, 예정과 선택 교리, 언약 신학은 이미 칼빈에게서 전수된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성경을 언약이라는 관점으로 읽는 것이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언약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라고 할만큼 언약은 이들에게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이었습니다. 

  

  언약 신학 또는 연방(계약) 신학(federal theology)은 종교개혁기부터 근대 정치 사상(political thought)과 결부되어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연방(federa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foedus’에서 왔으며, ‘foedus’는 언약(covenant)을 의미합니다. 

언약의 종류에는 전통적으로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행위 언약이며 하나는 은혜 언약입니다. 연방 신학은 이러한 두 언약을 잘 설명해주는 원리입니다. 특히 이는 행위 언약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아담은 태초에 언약을 맺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에 신실함을 통해 영생에 대한 ‘권리’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법적’인 관계이며 이 언약 안에서 ‘아담과 아담 이후 모든 후손에게,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됩니다. 그래서 행위 언약을 어기고 아담이 죄에 빠졌을 때 모든 인간은 연방(연합)의 대표 머리인 아담에게 연합됩니다. 즉, 아담의 죄와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전되고, 아담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죄책’이 전가됩니다. 
이러한 행위 언약으로 아담의 ‘대표성의 원리’가 적용된 곳에서 연방주의(Federalism)가 등장하게 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러한 연방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에서 ‘정치 언약’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정치 언약’은 근대국가를 수립한 사회계약론에 큰 영향을 줍니다. 

이는 먼저 대륙에서 칼빈의 동역자이자 후학인 베자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고, 이후에는 알투지우스와 같은 정치철학자에 의해 구체화됩니다. 
베자는 혼인 언약을 정치 언약의 근본으로 삼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그의 살중의 살, 뼈중의 뼈인 하와가 함께 신 앞에서 맹세한 혼인언약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언약은 국민들이 신 앞에서 서로 맹세하는 굳건한 언약입니다. 즉, 결혼 관계가 모든 언약의 가장 기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체는 ‘가정’에 있다고 봤습니다. 
알투지우스는 이것을 기반으로 정치적 언약에 따른 연방 정치(Federal politics)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정치 언약이 잘 나타난 사례로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12 부족이 연합하고 난 후 국가(민족)를 형성했을 때, 백성들이 다윗 왕과 언약을 맺는 것을 사례로 듭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지명)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사무엘하 5:1-3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르호보암 등 다른 왕들과도 이와 같은 정치적 언약을 맺는 의식을 행합니다. 이와 같이 정치 언약이란 한마디로 한 국가 내에서 정부와 국민 사이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영국 국교회를 비방한 죄로 재판 받는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Print.html?idxno=218

 

  

 청교도들은 이러한 정치 언약 뿐 아니라 원래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언약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개인, 교회, 사회’ 모두에 적용합니다. 
 청교도들의 ‘사회 언약’은 ‘정치 언약’ 및 ‘국가(국민)언약’ 모두를 포함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근원은 ‘성경’이었으며 특히 칼빈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을 특별히 택하여 부르시고 그의 가정이 이스라엘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언약, 계약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당시 스위스 제네바의 정치적 상황에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서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를 언약관계로 정리하고(정치 언약), 이러한 언약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 관계(개인 언약)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청교도들의 사회언약에서 확장되어, 하나님과 전체 공동체 사이의 언약(국가 언약)과 정부와 국민과의 언약적 관계(정치 언약)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모든 정치적 행위자 간의 관계를 언약(계약)으로 본 것입니다. 


*계약과 언약은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계약 사상이라고 하는 논문도 있고 사회계약론에 영향을 준 것이 있기에 편의상 병기합니다. 

 

 특히 청교도들의 사회 언약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민족을 ‘택하셨다’는 선민사상, 그리고 구속사적 종말론과 깊게 결부됩니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었듯,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갱신된 새로운 언약 안에 자신들과 자신들의 국가가 특별히 택함 받아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선택받은 민족(선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선민사상’을 당시 영국 청교도들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초림으로 인류의 종말 역사가 시작되었고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종말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이러한 구속사의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영국이 국가적으로 선택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청교도들에게 언약은 가장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개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그분의 절대 주권에 따라 선택되며, 택자들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그의 나라를 이룰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개념은 성경에서 단순히 개인만 아니라 국가까지 확장, 국가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번영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가 공동체가 성경에 기반하여 신앙과 윤리 상태가 올바르면 축복이 임하여 번영, 평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고 온갖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대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또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당신들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그 땅에서도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들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상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땅에서

당신들이 잘 살 것입니다. 

 

신명기 30: 15-20

 

또한 영국은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 속에서 선택 받은 국가(민족)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예식을 청산,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국가를 건설, 예수의 재림을 준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종교 뿐 아니라 정치개혁까지 단행하게 됩니다. 종교개혁 이후 이들에게 언약(연방) 국가의 수립은 국가의 흥망을 결정함과 동시에 다시오리라 한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청교도에 관련된 스코틀랜드와 영국, 미국의 교회사도 이에 직격으로 영향 받은 한국 교회사도 이승만이 말하듯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가 본래 가지고 있었던 기본 신학이자 이승만이 주창한 기독교 입국론의 기반이 되는 신학 사상입니다. 

 

국민 언약에 서명하고 있는 언약도들 https://ko.wikipedia.org/wiki/언약도

 

 언약 국가, 혹은 연방 국가 수립을 향한 여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 ‘언약도’에서 시작됩니다. ‘언약 신학은 스코틀랜드의 옛 신학이다’ 할 정도로 언약 사상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기원이 있고, 종교개혁 이후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정치 문화(civic culture)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문화는 1581년 소위 ‘국왕 신조’에서 문서화 되고, 1640년 ‘국가 언약’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들은 국왕과 일련의 언약들을 맺고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선민 이스라엘이 맺었던 언약들과 그 갱신 과정을 모방합니다.


 1581년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반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있던 시점으로 특히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신교국가들을 매우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때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카톨릭에서 장로교로 종교개혁을 마무리 짓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1560년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래교회조직 형태와 왕권과의 관계로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제 2권징서를 78년에 완성하면서 장로교 조직과 정치를 완성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에 추방 중인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 왕위로 복귀하기를 원하는 로마 카톨릭 세력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임스 6세도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얻고 싶어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은 “모든 반대되는 종교와 교리, 무엇보다도 모든 종류의 교황당을 싫어하고 혐오한다”는 고백을 담은 국왕 신조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때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의 집안이 서명하면서 전국의 모든 교구 목사와 대학 졸업생들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도록 요구 받게 됩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1590년과 1595년에 재차 확정됩니다. 

1638년 제임스 6세(영국에서 제임스 1세) 때 이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합병한 상태에서 왕위를 이은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공동 기도서를 도입하고 주교가 다스리는 감독 정치를 수립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때 상당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때 국왕 신조를 기초로 공동 기도서와 주교 제도를 기각하는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을 맺게 됩니다. 언약을 맺으며 이들은 ‘하나님과 스코틀랜드 민족 공동체가 혼인 서약을 하는 영광스러운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언약도’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찰스 1세와 영국 국교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로드는 언약도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합니다. 

 

국민언약 문서 https://greyfriarskirk.com/history/the-national-covenant/

 

 하지만 이미 언약도들의 열심은 국민 언약을 맺음으로 성사되었고 영국 본토의 청교도들에게도 국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언약을 맺으려는 의지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물론 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이미 연방신학과 사회언약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언약사상도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이미 언급했듯 직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청교도의 주류는 언약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비분리주의적인 장로교 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영국에서 장로교 운동의 지도자이자 연방 신학의 기초를 닦은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잉글랜드가 이미 국민적 언약에 들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신과 잉글랜드 사이에 실제적인 언약이 세워졌고, 신은 타락하고 교황당적인 교회조직을 제거한다면 그 대가로 전례가 없는 영적인 은총을 부어 주실 것이다’ - 토마스 카트라이트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절대왕정을 점점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후계자인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모두 청교도들을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그래서 이 당시 청교도들은 영국에 남아서 경건 운동을 하거나, 불법 지하교회를 하거나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해 그들이 원하는 사회와 교회를 건설하려는 자들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청교도들 자체가 결코 영국에서 주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신대륙에 간 청교도들로 1620-30년에 플리머스와 뉴잉글랜드로 이주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찰스 1세와 국민 언약을 맺은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은 당시 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본토에 있는 그들의 형제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양국의  청교도들은 서로가 분열된 이스라엘 민족의 두 국가 유대와 이스라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하나님께 택함 받은 국가들로 가족이며 결국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즉, 장로제와 의회제로 통일된 연방국가, 언약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1940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국회를 소집합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니 3주만에 의회를 해산해 버립니다. 
1642년, 결국 잉글랜드의 왕당파와 의회파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때 통일을 염두에 둔 스코틀랜드 평화 협상단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교회의 이를 요구하는 문서를 의회에 제출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신앙고백서, 교리문답서, 예배, 기도, 설교, 성례를 위한 지침서를 요구하고 같은 형태의 교회조직을 갖추기를 요구합니다. 

 언약도들은 1643년영국의회에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고 영국 의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에 기반하여 장로제를 채택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언약도와 영국의 의회가 통일을 서약합니다. 결국 왕당파가 지게 되고 영국의회는 왕정제도와 감독제를 폐지, 의회제와 장로교제도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1643년 5월 5일 대주교와 감독의 직분과 고위 교직자에 대한 치리제도를 전적으로 폐지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해 6월 12일 “영국교회의 치리와 예배형식을 결정하며 그 교리에서 거짓된 비평과 해석을 일소하기 위하여 의회의 상하 양원의 자문기관으로서 성직자들과 기타 인사들로 된 대회를 소집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총회에서 였습니다소집된 대부분의 회원들은 장로교 목사들이었습니다. 그해 8-9월에 영국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 대표자들이 서로 ‘엄숙 동맹과 언약’에 서명함으로서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의 교리문답과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청교도들에게 전파된 언약사상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집대성됩니다. 그래서 19세기 벤저민 워필드와 같은 대표적인 개혁신학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의 설계 원칙은 언약 신학’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영국의 절대왕정과 싸워 쟁취한 시민적, 정치적 승리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https://ko.wikipedia.org/wiki/웨스트민스터_총회
웨스트민스터 표준(1658) https://en.wikipedia.org/wiki/Westminster_Standards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스코틀랜드의 지도로 장로교회와 정치체제를 만들고 그들을 방해하는 왕당파 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낙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청교도의 크롬웰로 대표되는 독립파들과 각국의 대표자들 사이에 의견차가 심해져 결국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장로교 정치를 채택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미국 장로교, 회중교회와 침례교에 큰 영향을 줍니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원래 의도된 영국 국교를 제외한 모든 청교도 교회에 방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표준이 됩니다. 한국 장로교회도 이것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개혁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일시키는 시도는 좌절되었고 언약은 파기됩니다. 이러한 청교도들의 내부분열은 영국사에서 이후 청교도 통치가 실패하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을 그린 상상도. [사진 게티이미지]
뉴 잉글랜드 존 윈스롭

 

 영국에서는 이들의 연방 국가가 완성되지 못하지만, 놀랍게도 1920-30년대에 이주를 시작한 청교도들을 통해 신대륙에서 씨를 뿌리게 됩니다. 
먼저는 영국 여왕의 탄압을 받은 플리머스 청교도들로,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으므로 메이플라워 언약을 맺음으로 스스로를 정치집단화 합니다. 
1630년에는 존 윈스롭(John Wintrop)과 같은 비분리주의자들, 온건파들이 보스턴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만에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은 미국 청교도의 주류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들은 순전한 청교도적 언약 사상에 기반한 언약 국가, 개신교 공화국의 모형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이 정신을 잘 보여주는 설교가 바로 ‘city on a hill(언덕 위의 도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호 언약이 필요하며,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를 너희가 우리와 맺은 맹세라고 언급하면서 서로 주어진 언약에 충실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교회나 정부가 동등한 권세를 가지고 상호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뉴잉글랜드 초기 이민자들의 사회 언약은 이후 매사추세츠와 그 외 지역들의 제 2 식민지 시기인 1638-1639년에 ‘코네티컷의 기본 질서(The Fundamental Orders)’와 1641년 매사추세츠의 ‘자유의 본체(The Body of Liberty)’라는 문헌에서 발전하여 법제화됩니다. 

 
 

미 연방 헌법 Credit: Getty Images/iStockphoto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가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신대륙으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주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버지니아 북부 해협에 정착하여 세를 형성합니다. 일부는 뉴잉글랜드에 정착하기도 합니다. 
이 장로교인들은 연합 독노회를 구성하고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서로 협력합니다. 이렇게 뉴잉글랜드, 로드아일랜드,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 등 청교도들이 정착하고 확장한 곳에 종교의 자유가 꽃 피우고 언약 사상(연방 신학)에 기반한 헌법의 구상이 무르익게 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인 존 애덤스는 매사추세츠 출신으로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 존 마셜과 같은 연방주의자들과 함께 연방당을 창설하고 1797년 미국의 연방헌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합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세우고자 했던 하나의 연방국가에 대한 비전은 결국 미 연방의 헌법에 담겨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