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시기상 두번째 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바로 '한국교회핍박'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일제의 사상과 정치체제 그리고 미국의 사상과 정치체제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당시 사회의 기독교라는 장을 통하여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일제가 탄압한 신민회의 105인사건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상세히 서술 및 분석하여 세계사와 한국 근대사를 아는데에도 탁월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의 새로운 삶
독립정신을 쓰고 나서 한성감옥에 갇혀 있던 이승만 박사가 드디어 나오게 됩니다. 이미 이승만은 감옥에 있을 때부터 미국에 가서 공부할 계획을 다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나오자마자 그는 장로교 선교사 게일을 찾아서 세례를 요청합니다. 게일은 미국에 가면 워싱턴 커버넌트 장로교회 목사로 정치 사교계에서 뼈가 굵었던 햄린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는 이승만에게 추천서를 3통 써주게 되는데요. 당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감리교 선교사 벙커 등 선교사들의 추천서도 같이 받아 가게 됩니다. 그렇게 미국에 가게 된 이승만은, 햄린에게 세례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조지 워싱턴대에서 학사를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학업과 함께 했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던 해, 고종의 을사조약으로 조선이 망하고, 5년이 지난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받은 후에는, 순종이 나라를 완전히 이양하게 됩니다. 미국에 더 머물까도 생각했지만 나라의 사정을 생각하고 다시 돌아오기로 합니다.
서울에서 언더우드는 교수직을 제의했고, 게일 선교사는 서울 YMCA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당시 뉴욕 YMCA국제 위원회 총무 모트 박사를 만나고 나서 그는 교수가 아닌 YMCA로 가기로 합니다.
YMCA의 교장이자 열정적인 전도자 이승만
“서양 문명의 모든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음을 한국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전공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싶다. 일본의 전체주의 치하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당시 프린스턴대는 신학교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보수적인 장로교 학풍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이승만은 신학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1920년대에 프린스턴대를 처음 간 서북지역 신학생들의 선배 신학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국에 돌아와 그는 목사가 되지 않고 YMCA의 학감(교장)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서재필이 했던 것처럼 기독교 단체에서 학당을 세워 예수를 전하고 서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YMCA에서 연경반(Bible class)을 조직하여 성경강의를 했으며, 미국 독립운동사와 민주정치사를 가르치고 배재학당시절 협성회처럼 연합토론회를 계속 열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소위 말하자면 '의식화'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수강했던 임병직, 허정, 이원순, 정구영 등은 이승만의 망명 독립운동과 건국과 국정의 동지들이 됩니다.
6개월 정도 강의를 하고 나서 이승만은 전국 순례길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했던 ‘백만인 구령 운동’이라는 순회 전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미국 유학에서도 참여 했었던 이 운동은 한국에 와서도 참여하여 약 1년 3개월 정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와 강연을 강행하게 됩니다. 그러니 전남에서 평안도까지 서른세번의 집회에 칠천이 넘는 학생이 참여하였고 수십 개 기독교 학교에 YMCA를 조직하여 거대한 규모의 기독교적 독립운동의 전국 청년조직이 생기게 됩니다.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개성에서 ’제2회 기독학생 하령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독립협회 때부터 이승만을 돕고 당시 YMCA의 부회장이었던 윤치호의 한영서원에서 주재한 모임엔 전국 21개 기독학교 대표 93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인 부흥목사들의 설교로 부흥회를 열고 YMCA 활성화 방안과 세계기독학생협의회(WSCF) 가맹문제 등을 토론했습니다. 이렇게 이들 세력이 매우 강성해지자 일본 총독부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신민회와 서북지역 기독교
원래도 일제경찰은 1907년 고종 퇴위 후 양기탁, 이동휘,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지하 독립운동조직 ‘신민회’를 추적단속하고 말살하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윤치호가 이때 안창호와 손을 잡고 개성 상인들을 민족자본가로 결집하려고 신민회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YMCA활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은 귀국 당시부터 이미 일제가 가장 주목하는 정치 인사 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세력이 급격하게 확장되자 일제는 이들을 모두 다 잡아넣을 계획을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여한 후 서북 지방을 순방할 때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선천’ 지역에서 드러났다며,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날조합니다. 이에 신민회원들과 당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신자 600여명이 검거됩니다. 그중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아 이것이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서북 지역의 장로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일제가 기소한 사람의 절대 다수가 이 지역 장로교 신자들이었으며,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선천과 평양 출신이었습니다. 유죄 언도를 받았던 기독교인 중에서도 대다수가 이 지역 장로교인 들이었습니다. 1907년에 있었던 장로교의 평양 부흥과 이후 백만인구령운동을 통한 전국적인 교세 확장으로 개신교인이 된 사람들이 민족 독립 운동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평양과 선천 지역 장로교 계열의 숭실이나 신성중학교는 기독교 학교 중에서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이 제일 강했다고 합니다. 신민회 계의 평양 대성이나 오산학교는 애당초 항일을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였습니다. 당시 그래서 평양, 정주, 선천의 교회들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알려지게 됩니다.
105인 사건의 과정과 결과
일제는 서북 기독교인들을 잡으면서 당시 신민회의 회장이자 YMCA의 부회장이었던 윤치호를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 잡아넣고 이승만까지 잡아넣으려고 합니다. 다행히 이때 국제YMCA가 개입하여 서울에 달려온 모트 박사가, “미국 기독교의 주요인물 이승만을 체포하면 미국은 물론 국제적 반발이 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여 겨우 살게 되었습니다. 그해는 마침 기독교감리회 4년총회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해였고, 서울의 한미 목회자들은 서둘러 이승만을 한국 평신도 대표로 뽑아 파견하게 됩니다.
당시 일제는 기소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크게 확대합니다. 조선총독부를 대변하던 매일신보, 경성일보등은 장로교를 중심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동한 것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오직 고문을 통해 얻어낸 자백만 있었습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13일에 걸쳐 뉴욕 헤럴드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미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뿐 아니라 정계, 교육계, 언론, 법조계에 활동하는 거물들이 나서게 됩니다. 전 국무장관 포스터, 전 뉴욕시장 로우, 전 하버드 대학 총장 엘리엇, 예일대 총장 해들리, 뉴욕의 아웃룩 사장 아보트 등이 회동을 가지고 일본의 조치를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 출신 상원들이 일본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던 진다스테미 주미 일본대사를 만나 선처해달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YMCA 모트박사는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 협조를 구하기도 합니다.
미국 교회들은 일본 대사관과 교섭하는 한편 메이지 대 총장을 지낸 우자와 후사아키와 오가와 헤이키치등 일본의 저명한 법률가 16명을 고용,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합니다. 미국 북장로교는 기관지 컨티넌트를 통해 재판 경위를 소상히 조사해서 기재합니다.
“ 이 사건의 재판을 시작한 후로 일본과 청국과 아라사(러시아), 구라파 각국 미국과 오대리아주(오세아니아) 등 모든 나라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본을 비판하거나 변호하기도 하고 한국에 와 있는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교인을 비난하거나 변호하는 등 공론이 자못 분분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신문 중에서, 이 일에 전력을 기울여, 한국인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연속해 게재한 신문은 뉴욕 헤럴드와 태양보(뉴욕시의 유력일간지)이며, 영국 런던 시사주보와 일본 고베에서 발행하는 재팬크로니클 등 여러 신문이다.
교회 신문과 잡지 중에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발행하는 주간 ‘선교잡보’는 서울에서 보내는 직접 보고한 내용을 연달아 게재했다. 뉴욕에서 발행하는 장로교 선교회 기관신문 주간지 컨티넌트도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보낸 편지, 선교사들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오고간 전후의 공적 편지, 장로교 선교회가 워싱턴에 있는 일본 공사와 교섭한 공문들을 일일이 연속해서 게재했다.
작년 6월 27일에 시작하여 8월 27일까지 재판한 전말을 소상히 조사해서 게재했고 선교사들의 의견과 법률가들의 반론을 하나하나 적어 발매했다. 장로교 선교회 총회에서도 공평한 논조와 정직한 논법으로 전후 사정에 대한 논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해 각 지역에 배포했다. “
결국 105인 사건은 세계 언론에 퍼지게 된 무고함과 미국 교회와 선교사들의 노력, 미국 사회의 압박으로 인하여 최종적으로는 모두 다시 사면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미국에 간 이승만은 당시 105인 사건과 윤치호의 투옥이라는 정치적 음모에 얽힌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 미국 교회와 사회의 반응에 대하여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됩니다.
그는 이 사건을 둘러싼 일본인의 기독교 탄압과 의도를 세세히 고발하고 미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미국 사회가 당시 일제의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핍박을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초대 미국공사 박정양이 미국, 기독교, 민주주의는 하나로 묶여있다고 고종에게 보고한 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개화파들, 지식인들, 통치집단은 기독교를 미국의 종교처럼 생각했고, 미국을 '민주공화국의 개조(개척한 조상)'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일본 제국의 전체주의가 절대로 미국의 개인의 자유정신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그의 독립정신과 기독교입국론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울 것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계기가 됩니다. (앞서 쓴 '이승만의 독립정신'에서 기독교입국론과 독립정신이 뭔지에 대해 설명했으니 참고하세요:))
그때문에 '한국교회핍박'은 단순한 교회사가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 근대사의 1차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이승만의 대한민국 구상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중에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기다)라는 책을 쓰게 되는데요. 여기서 일본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해서 심도있게 분석하고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까지도 예견합니다.
어째서 미국과 일본은 전쟁할수 밖에 없나? 그 예견의 시발점이 바로 한국교회핍박에서 이승만이 쓴 일제의 기독교 탄압, 105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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