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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Voice

이승만의 독립정신

첫번째 이야기

독립정신

 

 

최근 다큐 ‘건국전쟁’이 100만을 넘어가면서 예상치 못한 흥행을 하고 있습니다. 

다큐 영화로써, 한국 근대사와 관련된 영화로써는 매우 이례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 중 아주 일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좀 역사를 아는 국민들 중엔 이승만하면 '독재'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는 분들이 종종 계실 텐데요. 

 

 

이름은 ‘독립정신’
The spirit of Independence. 



하지만 약 9년 전, 한 권의 책을 읽고 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독립정신’, The spirit of Independence. 

이승만이 이 책을 쓴 건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였습니다. 당시 그는 반역죄를 지은 정치범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쓴 책의 내용이 놀랍게도 서구 기독교 문명의 역사를 꿰뚫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과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 여기서 조선이 어떻게 주권을 지킬 것이며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적고 있었습니다. 

 건국 때 중요한 인물은 김구나 여운형 정도 배웠었고, 선생님께서도 여운형이 인기가 많았다고 그랬는데.. 근데 교과서에서 별 비중도 없던 이승만이 해방 이후에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나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이 좀 이해가 안갔습니다. 그런데 직접 책을 읽고 일생을 살펴 보니 이것이 납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이런 생각이 어떻게 19세기 말 조선에 있었는가?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깨어 있었습니다.

 독립정신을 외치던 청년 이승만은 하늘로부터 온 확실한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걸어나간 분이셨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의 공과를 같이 봐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공이 정말 많은 분이십니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다' 라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걸 알려면 독립정신을 읽어봐야 하고, 다른 저서들도 읽어봐야 어느정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태어난 분의 총명함이 21세기에 사는 저보다 낫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이분이 대한민국을 탄생시키려 애쓴 그 노력과 헌신에 저절로 겸손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승만의 결심 

19세기 말 조선의 정계는 개항으로 인해 선교사들과 서구 문명이 들어오게 되면서 두 파로 갈라진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이 다들 아시다시피 개화파와 수구파입니다. 수구파들은 조선조 내내 섬겨왔던 중화 질서와 성리학적 유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원군과 같이 쇄국정책을 펼쳐왔던 것이죠. 개화파는 또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뉩니다. 온건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원했습니다. 즉, 영국이나 일본같이 우리도 왕이 있는 상황에서 의회를 만들고 내각을 구성하여 통치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급진파는 왕이 없고 각 개인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공화제를 지지했습니다. 조선은 곧 한국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프랑스처럼 필요하다면 혁명을 일으키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이상적으로 개화했다고 본 이들은 친일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옥균, 박영효의 급진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켜 고종을 한번에 몰아내고 공화제 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승만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왕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려 시험공부를 했는데, 마침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시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 때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운영하고 있던 배재학당에 영어를 배우러 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매우 신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나 미국 선교사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만난 서재필과 신사상 

예배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배재학당의 또 다른 것이 청년 이승만의 가슴을 사로잡게 되는데요. 

바로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급진 개화파였던 서재필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와 어린 나이지만 갑신정변에 함께 했고, 정변이 실패한 후에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처음에는 일을 하다가 교회에 나가며 기독교 신자가 되고, 공부를 시작해 콜롬비아 대학의 야간부를 졸업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박사가 됩니다. 

 1894년 갑오개혁이 온건파에 의해 실시되면서 이들이 추구했던 입헌군주제적인 개혁에 의해 현재의 의회와 같은 중추원이 설립됩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자격으로 오랜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정계 중심에 있지 않고 대신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한글과 영어 모두로 발간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근대식 언론이자 신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서 1896년 독립협회를 창설하여 서구 기독교 문명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조선도 법률에 의해 개인의 생명과 재산이 보장되는 사회, 국민이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할 자유가 있으며 기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꿈꿨습니다. 그래서 법치,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 국가인 미국을 근대 국가의 모범으로 아시아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서재필을 보면서 다른 개화파들과 이력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양반 귀족의 자제였기에 평생 그런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은 미국에서 밑바닥부터 고생하며 영어를 배우고, 스스로 일하고 벌어서 생계를 책임지며 학교를 다니는 자립된 생활을 합니다. 함께 온 박영효, 서광범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양반때가 거의 벗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화파들이 후에 갑신정변에 대하여 회고하기를 정변이 실패한 것이 물론 외세의 개입, 부족한 준비 등도 있었겠지만 백성들이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자유를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백성들은 이들을 왕을 볼모로 잡은 폭도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것을 선물이라고 여겨야한다. 그래서 그들이 계몽되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게 정변의 실패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확실히 일반 백성들과 지식인 양반 계층의 삶과 생각이 다르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만큼 조선사회의 신분제 질서는 극명했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은 그런 신분제 질서를 타파하여 새로운 삶을 미국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서재필은 귀국해서도 정계에 있지 않고 애국계몽운동을 하며 독립신문을 만들고 협회를 만들어 백성들을 깨우는 일을 할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또한 서재필은 원래 급진개화파들이 꿈꿨던 프랑스 혁명이나, 영국의 입헌군주제와는 좀 결이 다른 미국식 공화정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미국에서 살던 삶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서재필의 생각은 이승만에게도 이어지고, 이후 독립정신에도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실을 만큼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하면서 가졌던 포부는 영어, 단지 영어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들은 나의 가슴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지 상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신사상을 설파하니, 설교시간에 졸던 이승만의 눈이 번쩍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신사상을 만났던 가슴 뛰는 순간을 1912년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혁명적인 사상을 만난’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그는 상투를 자릅니다. 영어를 열심히 배워 6개월 후에는 영어로 연설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인플루언서 청년 이승만의 정치활동  

서구 사상을 가르치는 것 외에 서재필은 당시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것을 조직하였고, 다양한 주제로 토론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마련합니다. 그가 미국 고등학교 시절 배운 토론회 문화를 그대로 가져와 민주주의적 협의 과정을 몸소 체득할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여기서 이승만은 최초의 민간 신문인 협성회회보를 만들어 주필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는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을미사변 이후고종이 러 대사관으로 피신한 상황이라 러시아의 입김이 매우 커진 상황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세력을 얻자 절영도를 그들의 석탄고를 세울 장소로 달라며 압력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영토는 주권에 매우 중요하기에, 이승만은 이것이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질적인 전쟁은 아니었지만 전쟁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게 ‘절영도 조차 사건’인데, 당시 고종은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려 합니다. 그래서 독립협회에서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맹렬히 비판하였고, 이승만도 참여하여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으로 인해 러시아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미 설치된 일본까지도 철수하는 성과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런 사건들때문에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되자 집회를 주도하여 의회 설립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요구를 받아들이고 박정양, 민영환을 중심으로 개혁파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이러한 승리에 이어 그들은 관민공동회를 열고 대신들과 정무를 협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헌의 6조’를 채택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형식만 있었던 중추원을 실제로 의회로 만들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 수구파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부정하고, 입헌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세우려고 한다며 고종에게 상소합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거리에서의 연설과 헌의 6조 시행의 요구, 보부상을 동원한 핍박에도 만민공동회는 계속 개최되면서 고종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만민공동회의 활동만으로 이 일들이 되었다기보단 이즈음 국제정세상 러시아의 힘이 약화되었던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승만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요즘 말로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가 됩니다. 

 
 
 

선동가요 반역자 이승만 회심하다 

 물론 이러한 급진성은 당시 조정의 수구파들에게 점점 눈엣가시가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를 돕던 배재학당의 아펜젤러 선교사까지도 이렇게 하면 일찍 죽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은 1898년,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하나였던 박영효가 중추원을 꾸리는 과정에서 귀환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음모에 연루가 되고 반역의 모함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한성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근데 가만히 있지 않고 탈옥시도까지 하는 바람에 있던 형기에 더 중형이 더해지게 됩니다. 이승만은 후에도 말하길 자신이 평생을 선동가요 운동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선동가요 운동가요 실제로 반역자인 24세 청년 이승만은 그 젊은 나이에 최종적으로는 사형수가 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에게는 모진 고문이 뒤따랐습니다. 

 


“목에는 10kg가 넘는 큰 칼을 메고 가슴과 두 팔 두 손목은 수갑과 오라 줄에 묶이고
두 발목은 무거운 차꼬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족쇄를 질질 끌며 날이면 날마다 끌려 나가 형틀에 엎어놓고 묶여 고문을 받는다. 
장정 두 명이 다리 사이에 옹이 박힌 몽둥이를 넣어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엔 세모난 대나무 토막을 끼워 살점이 떨어지도록 비틀었으며,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매질을 계속하니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수 있으랴.” 


 

그런 고문이 계속되는 중에 어느 날도 고문을 받아 감옥 방에 내던져진 이승만, 

입에서는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때, 머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참혹한 감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 사람들이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감옥에 가게 될 터였다. 
그러자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선교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오.’ 
그런 기억이 나자 그대로 큰칼에 얼굴을 대고 기도가 절로 나왔다.” 


 

혈기왕성하고 6개월만에 영어를 마스터하고 온갖 유교 경전을 줄줄 외고 있던 천재적인 청년.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하던 그의 모습은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고 배재학당에서 들은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껏 부풀어있었을까. 하지만,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감옥바닥에서 맞이하게 되리라는 생각에 직면하게 됩니다. 소위 ‘실존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란 성경에서는 원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원죄라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먹지 말라 명령하신 법을 어기고 반역하여 하나님처럼 되려는 본성을 말하는데, 반역자가 되어 한성감옥에 갇힌 이승만은 자신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불현듯 배재학당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영혼을 구해주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그 순간,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불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가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몸을 맡기고 입에서 피를 토하며 간절히 부르짖게 됩니다. 그때 이승만은 신비한 체험과 함께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을 겪게 됩니다. 이런 때에도 참으로 놀라운 것은 거의 죽어가는 와중에 자신의 구원 만을 부르짖지 않고 나라의 구원을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사람이 태어나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구나 싶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이 나라의 개혁이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에비슨 선교사에게 영문성경과 영어사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고, 큰 칼을 쓰고 오라 줄에 묶인 그 상태로 동료가 넘겨주는 신약성경을 끊임없이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 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한 후 재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종신형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청원과 도움으로 최종 10년으로 감형하게 됩니다. 

사형수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또 10년의 감옥생활의 불구덩이를 거쳐 하늘로부터 회심한 이승만의 마음에서 나온 책이 바로  ‘독립정신’ 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참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열정과 힘이 느껴집니다. 이번에 글을 쓰며 다시 읽었을 때에도 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고 감동시키는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글을 읽을 백성들을 생각해 순한글로 쓰였고 어려운 문체로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별로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이, 20세기에 아시아 유일의 자유민주주의 신생 국가 대한민국을 세우는 이승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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